An artist is somebody who produces things that people don't need to have.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앤디워홀의 생애
앤디워홀은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슬로바키아(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루신인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하는데 지하실에서 어머니가 사준 필름 사진기와 인화기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카네기 멜론 대학교에 진학해 광고 예술을 배워 졸업했고 1952년에는 신문 광고 미술부문의 아트 디렉터스 클럽상을 수상했다. 이후 상업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전업 예술가로 전직했다. 유명한 자신만의
작업실인 '팩토리'를 만들어 지인들을 불러모아 사교장처럼 만들고 각종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그는 미술의 세계로 발을 옮겨서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의 만화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한 뒤에 여기서 손을 뗀다. 1961년, 33세의 그는 캠벨 수프의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 아트를 탄생시켰다. 언제나 대중적인 화제를 선택했는데 마릴린 먼로가 갑자기 죽자, 그걸 소재로 사용해서 작품을 대량생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앤디워홀의 심장<나는 앤디워홀을 쏘았다.>
1968년 6월 3일, 40세에 접어든 그는 전남성 말살단(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 소속의 여성주의자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권총으로 피격을 받는다. 이 솔라나스란 인물은 망상에 사로잡혀 지로디아스와 워홀이 자신을 몰아내려 결탁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저격했다. 이 총격으로 인해 워홀은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아야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이후 밸러리 솔라나스를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자이자, 이에 저항한 영웅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간되었다. 이 중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쓴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가 있다.
앤디워홀의 죽음
1987년 2월 21일,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에 염증이 생겨 수술을 받은 다음 날 상태 악화로 58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 되어 간호사와 농담을 하거나 동료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금방 호전되는가 싶다가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본래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았다. 허나 정작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앤디워홀의 팝아트
일반인들은 팝아트를 그냥 당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추려다 작품으로 만들면 되는 것 정도로 취급하지만, 의외로 워홀의 팝아트는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워홀이 한 작품 중에는 <13명의 수배자들(thirteen most wanted men)>같이 당대의 흉악범죄자들을 벽화로 만들거나, 언론에 보도된 인종범죄 사진을 <마릴린 먼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 번 병치해서 프린트하기도 했다. 이런걸 보면 단순히 가벼운 흥미거리로 당대 사회 유행을 취급한 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슷한 프린트들을 반복하는 워홀의 수법이 기술발전으로 이미지가 대량 복제되면서 정작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독일에서는 의외로 이렇게 워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평론가들의 해석이지, 앤디워홀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말을 아꼈다.
앤디워홀과 바스키아
여담으로 워홀은 장 미쉘 바스키아의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초반에는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바스키아가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워홀과의 연락을 끊었었다. 그러나 1987년 워홀의 사망소식을 듣고 1년뒤 바스키아도 헤로인 중독으로 워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