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샤넬로 불리던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세계 패션 역사에, 특히 여성복과 실용성이라는 부분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모국 프랑스에서는 과대평가 논란이나 나치 스파이 논란 등 여러 면에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 아세요?
출생: 1883년 8월 19일(프랑스 소뮈르)~사망 1971년 1월 10일 (향년 87세)
직업: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스파이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 코코 샤넬
모든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 코코 샤넬의 모토
샤넬의 유년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과 독립심이 투철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이라 비유하여 꺼려했다고 한다.
샤넬의 러브스토리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이상하게도)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샤넬은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왔다. 미지근한 반응의 프랑스와 달리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가브리엘 샤넬, 전범?
현재 대중이 알고 있는 페미니즘적인면은 사실 마케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샤넬은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나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히틀러를 지지한다고도 밝혔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선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나치를 이용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동업자를 사업에서 퇴출시키려 했을만큼, 전쟁 기간 동안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렇게 최고급 리츠 호텔에서 지내며 나치 정권에 부역하다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급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샤넬은 전쟁기간 동안 파리의 호텔 리츠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나치 장군들과 요원들의 숙소와 가까웠다.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1년 여름에 가브리엘은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샤넬은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샤넬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이미 프랑스는 수많은 나치 정권의 협력자들을 만 명 단위로 사형시켰던 만큼, 당연히 코코 샤넬도 부역 혐의로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과거 애인이였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인 윈스턴 처칠 수상의 도움으로 ‘증거 불충분’으로풀려나, 추방되다시피 스위스로 도피한 뒤 10년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 했다.
극우적 성향이었던 만큼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여성 인권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다.
사생활 또한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신여성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코코 샤넬의 삶은 재벌급 상속자, 귀족, 정치장교들을 스폰서로 삼아 첩이 되어 그들의 자금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키우고 성공시키는 식이였다. 정경유착 위에 서술되어있다시피 나치 부역 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전애인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가브리엘 샤넬의 죽음
1971년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가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 코코샤넬 브랜드 TMI
코코 샤넬이 나치에 협력한 이유 중 가장 근거있는 부분으로는 그녀의 파트너이자 코코 샤넬에게 향수로 큰 돈을 벌게 해준 사업파트너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권리를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 브랜드를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에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 가문에게 팔아버린다.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실소유하고 있는데 둘 모두 세계 부자 순위에서 항상 이름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