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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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일상을 나누는 파리 이방인J입니다. 

오늘은 프리다 칼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여기저기 프리다칼로를 표현하는 캐릭터를 볼 수 있죠.

그녀의 멋진 패션센스와 예술적 감각까지 더해져서 그녀의 인기는 살아생전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프리다칼로를 종종 패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대하곤 하는데 사실 저는 그녀의 이미지가 좋긴 했지만 사실 왜 그녀가 

패미니즘의 아이콘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프리다칼로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프리다칼로를 보는 리사심슨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출생 1907년 7월 6일~ 1954년 7월 13일 (향년 47세)

프리다 칼로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일생 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6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Yo sufrí dos accidentes graves en mi vida, uno en el que un autobús me tumbó al suelo. El otro accidente es Diego;. Diego fue el peor..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실을 그릴 뿐.

 

 위 문장들은 프리다칼로의 생애와 정신을 고스란히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일생

프리다 칼로 <가족초상>

- 가족

멕시코 혁명(1910) 3년 전인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시티 근교 코요아칸에서 헝가리계 유태인 혈통이며 독일에서 이민 온 곤살로 기예르모 칼로와 인디오, 스페인 혈통의 마틸다 칼데론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 기

예르모는 어린 칼로에게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영향을 주었다.

 

-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했던 국립 예비 학교에 입학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당시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스 바스콘셀로스의 정책 덕에 그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어 프리다가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35명이였다. 프리다와 동급생들은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문제아였고, 장차 멕시코의 주역들이었다.

 

- 사고

1925년 9월 17일,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나 대수술을 받게 된다. 이 사고로 칼로는 왼쪽 다리 11곳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으며 요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진다. 이 사고로 칼로는 죽을 때까지 하반신마비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고 세 차례의 유산, 그리고 끝없는 고통스런 수술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프리다칼로와 남편 디에고 리베라

 

-결혼

국립학교에 다닐 당시 프리다는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를 만났다. 결혼 후 프리다는 디에고와 여러 작품 활동을 했지만 디에고의 여성 편력으로 2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을 했다.

 

- 작가로서의 인정

작가로서 공식 경력은 작가 생활을 시작한지 12년만인 1938년 멕시코시티 대학 갤러리 그룹전에서였다. 이 전시에서 앙데르 브르통의 주목을 받고, 루브르 박물관이 그의 자화상을 구입해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가 됐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의 멕시코전에서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 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 페미니스트로서의 인정

그녀의 생전에는 주로 화가 디에고의 ‘화가 아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재조명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매체에서 회자되며 기구한 생애, 독특한 캐릭터와 작품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오늘날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멕시코 예술과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페미니즘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사고치료중에도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칼로

 

  1. 6살에 소아마비, 18살에 교통사고, 30여 차례의 수술, 죽음까지 이른 병마, 남편의 끝없는 여성편력, 세 차례의 유산, 불임 등 그의 삶에 반복된 고통과 절망은 수많은 작품의 오브제가 되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그림 중 자화상이 많다. 143점의 회화 작품 중 1/3 가량인 55점이 자화상이다.

2. 칼로는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완고한 공산주의자였으며, 디에고를 비롯한 공산주의자 주역들과 함께 멕시코의 정신을 일으켜 과거 식민지의 잔재를 극복하려 하는 등의 정치적 활동과 문화적 계몽 등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3.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과 관습을 극구 거부했다. 조각가 노구치,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 등 나이와 성별에 구분 없이 자유롭게 연애했다.

프리다 칼로와 연인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그녀는 개인적 역경을 이겨내고 멋진 성취를 이러냄으로서 패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알고나니 더 멋지고, 더 매력적인 프리다칼로였습니다.

이만, 포스팅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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