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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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인터넷공간에 우리 귀염둥이의 이름을 적는게 아직 어색하다. 

아니 나는 이름을 부를때마다 눈물이 조금 난다. 

비슷한 상황을 가진 분들을 위해 글을 적어보고자 하는데, 그런데도 일단 조금 망설여지고,,, 일단 우리 귀염둥이는 

그냥 귀염둥이라고 부르겠다. 이게 진짜 이름은 아니었는데 그냥 나는 이름을 부르고 적을 용기는 아직 안난다. 

그 이름을 쓰면 그냥 어디선가 튀어나올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걸 아니까... 

 

 

나의 반려견을 그려보았다... ㅎㅎ 그림실력은 초딩같다. 

그러니까 내가 귀염둥이를 만난것은 열살때다. 그때만 해도 강변역에 가면 할머니들이 쭈그려 앉아서 새끼 강아지를 팔곤 하셨다. 나는 항상 그 근처를 다니면서 눈을 못뗐는데 그러던 어느날 큰맘 먹고 엄마 몰래 귀염둥이를 데리고 집에 갔다. 그렇게 만난 귀염둥이와 십육년을 함께 살았다. 고맙게도 오래 살아주었다. 내가 열살에 스무여섯살. 가장 왕성한 나이가 될 때, 귀염둥이는 늙어갔다. 어쩔수 없는 생물학적 나이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시간을 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매일 슬펐다. 슬프고 또 슬펐다. 

 

 

이미지 출처:헬스인뉴스

죄책감

일단 반려견이 늙어가면서 드는 것은 죄책감이다. 내가 열살때만해도 지금만큼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일이 열거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좋은 주인이 아니었다. 더 잘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산책도 더 자주 시켜줬어야했고, 더 좋은 사료를 먹였어야했고, 더 자상하게 굴었어야했고, 더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나는 평생 우리 귀염둥이가 내 곁에 있어줄줄 알았다. 집안에 공기처럼 자박자박 발걸음소리를 내며 평생 내 문앞에 있어줄줄 알았다. 나는 어렸고, 누군가의 죽음을 당해본적이 없어서 귀염둥이가 늙어가고 있고 약해지고 있고 ,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게 무슨의미인지 이해는 못했던것 같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슬퍼했으면서도 잘해주지 못햇다. 그게 두고 두고 미안해서 정말 매일 울고싶다. 종교도 없는데 그냥 기도를 한다. 혹시 우리 귀염둥이가 들을까봐. 사랑한다고 말 안해도 알것 같아서 미안한다고 말한다. 미안하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서. 

 

너의 마지막

나는 해외에 있어서 귀염둥이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엄마와 오빠는 일단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하긴 하는데, 귀염둥이는 엄마가 설거지 할때 뒤에서 엄마를 보다 떠났다고 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지막까지 거기걸어가서 엄마의 뒷모습을 본 기분은. 그래도 혼자가 아니었어서 다행이다. 그때 엄마가 다행히 있어서. 

일단 엄마도 충격을 받았던것 같은데... 멀리서 나는 그날 오래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걱정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갔을때 귀염둥이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슬펐다. 

 

개가 늙어가면 예전하고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조금만 불러도 꼬리치며 달려오던 개가 일단 좀 시큰둥해진다. 아마 기력이 딸렸을수도 있고 소리를 잘 듣지 못했기때문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죽을때를 대비해서 주인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귀염둥이도 좀 새침해졌다. 그래서 새치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럴때는 믿음을 주기 위해 항상 곁에 있다는것을 각인시켜주고 시간을 보내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신체적인 통증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혼자 엎드려 있을때는 만지지 않는게 좋다고 한다. 

 

산책을 할때 그렇게 좋아했는데 집 앞에서 오분거리 이상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집으로 못돌아갈까봐 무서워서 그렇다는 글을 어디선가 들었다. 다리가 아팠을수도 있다. 나가려고 하면 꼬리를 그렇게 치고 좋아하는데 나가자마자 더이상 안가겠다고 버티는것을 보면 슬퍼서 껴안고 동네 한바퀴 돌았다. 좀 후회되는건 강아지 유모차 살걸 그랬다. 그랬으면 더 편하게 잘 다녔을텐데. 모르는 사람은 개를 안고다녀도, 유모차에 태우고 다녀도 극성이라고 욕한다. 애가 없어서 인형놀이를 한다고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말은 솔직히 상관 없는데 모르면 닥쳐줬으면..  아무튼, 그걸 못해준게 좀 아쉽다. 안고 다니면 그때는 낑낑 거리지 않고 잘 안겨있는데 이제는 하얀 눈으로 세상을 더 담겠다고 깜빡이면서. 

 

오래 키운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삼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고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난다. 너무 귀엽고 애기같은 모습에 내가 지켜줘야 했던 그 존재의 모습에, 어쩌면 나의 아주 작은 수고로 훨씬 행복했을지 모르는 그 아이의 모습에 눈물이 난다. 내가 조금 더 잘 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우리 귀염둥이는 우리 가족의 사랑을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정말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사랑한 만큼 잘해줬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우울증밖에 걸릴일이 없으니까 그만 생각해야겠다. 

 

어쨌든, 좋은 기억을 많이 주었고, 우리는 아직도 귀염둥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한다. 함께 보낸 나의 유년이 있어 감사하고, 오래 기억해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잊는다는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반려견을 보내고, 나는 좀 외로웠던 기억이 난다.

가족들은 서로 슬퍼하느라 사실 이야기 꺼내기를 꺼려했다. 나에겐 너무 큰 일인데 사실 친구에게 이야기해도 이 펫로스 기분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심지어 강아지를 키우는 견주조차 사실 잃었을때의 기분을 상상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십육년을 함께 한 어떤 생명체가 사라졌다는 것의 무거움을 슬픔을 나눌 곳이 부족했다. 친구한테 이야기해도 곧 잊혀지리라 생각하는 경우가 컸고, 공감해주고 내가 얘기할 수 있게 해준다기 보단 그냥 잃어버린 물건을 대하듯 툭툭 털어버리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느껴졌다. 

 

새로운 반려견을 키울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잃었다는 슬픔이 너무 크다. 강아지를 보면 전부 귀엽다. 가끔 우리 귀염둥이와 닮은 개를 보면 눈물이 난다. 그런데 키울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어딘가에 여전히 귀염둥이가 있을것 같다. 한국의 집에 가면 귀염둥이가 자고 있을것 같다. 나는 반려견을 잃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위로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강아지를 입양해보는건 어떠냐고 제안하는것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건 사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말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화를 나게 만들기도 한다...

 

어쨌든 펫로스 증후군. 겪은 사람만 알것이다. 

슬픈일이고 충분히 애도가 필요하다. 

늙은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반려견이 늙어감에 따라 보이는 변화를 자주 체크할 필요가 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뭔지, 어떤 행동을 할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전혀 다른 개처럼 변할 수도 있으니까. 

시간을 많이 보내줬음 좋겠고, 후회하기 전에 더 잘해줬으면 좋겠다. 그 작은 털뭉치의 행복이 온전히 내 손에 달려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권한이 내게 주어졌는가. 그의 우주와 세상은 전부 나니까. 그들은 정말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니까. 우리도 그만큼 잘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변에서 반려견을 잃은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얘기를 오래 들어주고 슬픔에 공감해줬음 좋겠다. 

 

 

 

그리고, 당신이 반려견의 마지막을 겪으셨다면, 

아마 충분히 행복했으거라고 충분히 당신은 좋은 가족이었을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우리한테 가장 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함께 보낸 시간 기쁘게 기억하기. 슬픔으로 얼룩지지 않고 웃으며 떠올려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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