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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٩(๑❛ᴗ❛๑)۶이번 요약사전 포스팅의 주제는 ' 콜럼버스와 미국 ' 입니다!

 

 

크리스토프 콜롬버스

 

목차

  1.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2. 콜럼버스의 의의
  3.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4.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학살
  5. 미대륙 '아메리카' 어원
  6. 콜럼버스의 몰락과 죽음
  7. 콜럼버스의 평가

 

 

1.크리스토퍼 콜롬버스

1447년 혹은 1450년 출생

제노바 공화국 출신, 주 활동지는 스페인.

 

2.콜롬버스의 의의

-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 (X)

-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의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사람 (O)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으며 유럽인 중에서조차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이슬란드를 거쳐 현 캐나다 동부에 갔다거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어부들이 캐나다의 래브라도 반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며, 바스크인들이 어업, 포경을 목적으로 북미 쪽 바다로 가거나 해안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3.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콜럼버스는 동방견문록을 읽고 지구는 평면이라는 당시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평민들 사이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당시 원양 항해기술 자체가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하에 발전한 것이었고, 바다를 끼고 사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선 상식이나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바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과 인도와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지만 계속해서 거절당했다가 마침내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1차 원정 - 1492년 8월 3일에 서쪽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리고 10월 12일에 그가 '인도'라고 믿은 대륙(현재 미국) 본토와 가까운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상륙해서 '산살바도르 섬'으로 이름 붙였다.

■2차 원정 - 1493년에 콜롬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

■3차 원정 (1498~1500), 4차 원정(1502~1504) - 콜럼버스 탐험대는 점점 더 잔인해져서,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4.콜롬버스 아메리카 대륙 학살

학살에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매춘부로 만들었다.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족은 전멸했고 혼혈 후예만 남았다.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5.미국 대륙 아메리카의 어원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모든 증거가 여기가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자 콜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론을 살짝 수정하는데 '지구 구형론을 부인'해버린다. 정확히는 자신의 3차 항해일지에서 지구는 둥글지 않고 (서양)배 모양 형태라고 주장한다.

콜럼버스의 항로를 따라서 신대륙에 가본 사람들이 여럿 나왔고, 그중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당당하게 그 땅을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고 자신의 책자를 통해 주장했다.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인식하고 발표한 아메리고는, 하급 선원의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쓰러진 콜롬버스 동상 ZUM NEWS

 

6.콜럼버스의 몰락과 죽음

콜럼버스는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구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고,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섬을 부하 선원이 발견했는데 협박해서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거짓 보고한 적이 많다.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으며 가정을 얻고 원주민들과 섞여 잘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이들 앞에서도 원주민들을 탄압했다. 1504년 1월에는 부하 일부와 원주민들이 손잡고 콜럼버스를 죽이려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 제3회 항해(1498∼1500)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됨.

- 후원자이던 이사벨 1세가 죽자마자 몰락하게 된다.

-무수한 빚에 시달렸기 때문에 몰락하여 아들 디에고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게 된다. (매독으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

   

7. 콜럼버스의 평가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학살자였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68 혁명 등의 대두로 사회 정의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추락했다. 20세기 학자들은 그를 학살자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날 대신 원주민 학살의 날로 추모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콜럼버스 인종대학살 

 

참고자료: 위키피디아요약

 

그럼, '콜럼버스와 미국 ' 에 대한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ʘ̅͜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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