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 2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인도아리아 계통의 사람들이며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2.로힝야-미얀마사태 배경?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시절 영국인들은 미얀마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비슷한 쌀 생산 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영국인들은 미얀마(버마인)은 반항적이라며 순응적인 인도인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통제 가능한 노동력을 투입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정책은 이후 수 차례 미얀마와 전쟁을 거치며 범위가 확대되었고, 미얀마를 완전히 정복한 시점에는 그 대상이 미얀마 전토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이주시킨 인도인들에게 작황과 관련없이 고정된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소유권도 넘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로힝야는 미얀마의 모든 소수 민족과 버마족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들이 영국으로부터 불하받은 농장은 미얀마인에게서 빼앗은 농경지였기 때문이다. 로힝야들은 이렇게 미얀마인들에게 증오받으면서 미얀마에 정착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점 때문에 그 이후에도 화해하지 못하고 주변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로힝야는 지속적으로 영국 식민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승려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모욕감과 위기 의식을 느끼고 "무슬림들을 전부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벼르게 되었다.
3.로힝야 미얀마인 충돌
2차 대전 이후 미얀마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인도로 피신하였지만, 농장을 일구던 로힝야족는 떠날 수 없었다. 로힝야들은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 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무려 2만 명이나 죽였다. 이에 분노한 아라칸인들이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군 역시 아라칸인에게 무기를 지원하였고 라카인족들과 레드 카렌족은 로힝야 5,000명을 죽였다. 로힝야는 또한 평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불교 절을 부수고 승려를 학살하는 등의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
초기 미얀마 정부에는 로힝야의 세력이 무시 못할 정도로 컸으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얀마 네 윈 장군이 쿠테타로 정부를 뒤엎으며 로힝야는 시민권을 잃게 되었으며, 거주지에서 쫓겨나 방글라데시로 추방하기 쉽도록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라카인 주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
4. 로힝야사태 현재
현재도 영국은 로힝야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안보리에 로힝야 문제를 상정 하였다지만 로힝야를 영국 난민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로힝야족은 절대다수가 무학자에다가 사우디아라비아발 근본주의까지 주입받은 상황이라 누구도 섣불리 난민으로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 로힝야족이 기댈곳은 방글라데시 뿐이지만, 방글라데시에서도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 강한 로힝야족이 반가울리가 없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자국 내의 인구와 실업자가 넘쳐 이민이 전혀 필요없는 상황이다. 기댈 곳이 없는 로힝야는 IS에 자진해 충성을 맹세하거나 지하디스트에게 무기를 공급받는등의 행위를 보이고 있어 섣불리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로힝야족의 힌두교 학살 사건등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로힝야 내에서 폭력 행위를 벌이는 사람은 매우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되며 나머지 로힝야인들은 그저 박해에 힘없이 당하고 괴로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