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누구지? 간단 요약!
안녕하세요! 일상을 나누는 이방인J 입니다. 오늘은 유명한 작가이자 시대의 아이콘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서 포스팅 해 보려고 해요.
그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과 문체까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본명: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국적: 미국
출생: 1899년 7월 21일 ~ 사망: 1961년 7월 2일 (향년 61세)
직업: 미국의 참전용사, 종군기자 그리고 소설가.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작품: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마찬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등장 이후,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로, 유럽은 문학의 주도권을 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거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와 포크너가 꼽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유년?
헤밍웨이는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둘 다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는 그때문인지 평생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헤밍웨이가 어렸을때 여장을 시키곤 했다고 한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
헤밍웨이는 처음 기자로 시작했고, 1918년 1차 대전에 참전하려 미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권투 선수 시절에 얻은 눈 부상과 어머니에게서 얻은 선천적인 시력 낮음으로 인해 미 육군, 해병, 해군 모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사 소속의 구급차 운전사 모집공고가 뜨자 바로 신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했었다. 1918년 5월부터 운전사로 일하는 중 7월 8일에 두 다리가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일시적 불구가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받던 도중, 전쟁이 끝났고 다리 부상도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겪은 걸 기반으로, 자전적 소설인 논픽션과 허구를 약간 섞은 <무기여 잘 있거라> 책을 집필했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 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한다.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말년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헤밍웨이는 노벨상을 타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만 그의 말년은 생각만큼 영화롭지 않다. 노인이 되면서 약해지는 자신과 글이 써질 수 없는 것을 비관하던 그는 자살을 했다. 그의 아버지부터 해서, 그의 가족 중 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형, 누나, 손녀(배우였던 마고 헤밍웨이), 본인)
헤밍웨이는 자살의 요소인 여러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전성, 정신 질환, 약물 오남용, 자살 사고, 소아기 외상 등이 위험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 성격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진취적인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자기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자를 밝혔으며 사생활도 문란해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결혼 중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며 지냈다. 일단 그의 아내들을 정리해 보면…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 - 1921~27년까지 결혼.
폴린 파이퍼(1895~1951) - 1927~40년.
마사 겔혼(1908~1998) - 1940~45년.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 1946~61년
헤밍웨이의 문체
It seems she had one haemorrhage after another. They couldn’t stop it. I went into the room and stayed with Catherine until she died. She was unconscious all the time, and it did not take her very long to die.
캐서린은 계속해서 출혈을 하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멎게 하지 못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캐서린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었다. 캐서린은 줄곧 의식이 없었고, 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 《무기여 잘있거라》 中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Hard-Boiled Style)이라고 부른다. 이 문체는 잡다한 수식이 없고 간결하다. 또한 제3자의 시각으로 사실만 무덤덤하게 나열한다. 헤밍웨이는 초창기부터 장년기까지 계속했던 신문기자 및 자유기고가 생활을 통해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에 익숙해졌고, 당시 유행하던 하드보일드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격과 부합했기에 영향을 받았다.
Hemingway's legacy to American literature is his style.
헤밍웨이가 미국문학에게 남긴 유산은 그의 문체다.
마무리
한 시대의 살았던 헤밍웨이의 삶, 영화같고 비극적인 면이 다분합니다.
그의 작품과 이름이 여전히 내려오는데는 그의 전설같은 삶의 이야기들도 한몫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이만 헤밍웨이에 대한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참고: 나무위키